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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 스토리
 
#07 VOCA 이야기
 

교파와 관계없이 성령의 사역을 배척하기도 하고 또 성령의 사역에 의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박 목사님은  핀란드에서도 이런 현상을 보았다. 박 목사님의 집적 증언을 들어 보자.

 

“ 핀란드로 떠나기 전 만반의 준비가 됐노라고 연락이 왔다. 저들은 정말 성령을 통한 깊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집회를 위해 주최측에서 큰 홀을 예약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져서 주최측에서 나에게 미안해하면서 말하기를 어려워하였다. 사연인즉 홀을 예약해 놓았으나 집회 며칠 전에

갑자기 계약을 취소하겠다는 통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주최측의 말에 의하면 국교인 루트교에서 건물주에게 압력을 넣어 다른 종파의 전도 집회를 간접적으로 방해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여부는 알 수도 없지만은 따질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궁여지책으로 헬싱키 역전에서  집회를 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회는 성공적이었다. 수 만명이 몰려 집회장소에 다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서서 예배를 볼 정도였다. 집회는 매일 밤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꼭 21일간 계속되었다.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여느때와 같이 열광적인 찬송과 기도와 아멘과 할렐루야가 연속되는 뜨거운 집회였다.
그런데 설교 도중 나는 한국교회가 6·25 공산남침을 당했을 때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요청했으며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베어도 그 그루터기를 남겨 두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산 침략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산주의라는 말이 떨어지자 아멘 할렐루야의 반응이 점점 사그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설교 도중에 한사람씩 일어서서 슬슬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김이 빠진 설교를 마칠 때쯤에는 거의 3분의 1이 자리를 뜨고 말았다. 집회를 마친 후 통역하던 젊은 목사가 ‘박 형제, 당신은 오늘 큰 과오를 범했습니다’라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소련의 위협이 워낙 커서 공산주의를 비방하는 발언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후에 공산당이 당시 의회에서 제2당으로 48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 목사님은 핀란드 집회를 마치고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전역을 다니면서 교회에서 혹은 문화회관, 노동회관 등에서 연속 집회를 가졌다.

박 목사님의 증언을 계속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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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박성기목사님 덴마크집회 한 가정에 초청
 
 

 “하루네 네 집회를 인도해야 할 때도 있었다. 이런 집회가 3개월간 연속됨에 따라 몸이 지탱하기 곤란해졌다. 안질이 생기고 몸이 아프고 집회가 힘들었다. 3개월 후 한 주간의 휴가(?)를 얻어 스위스의 쥬리히로 내려가 좀 쉬면서 그 곳에 있는 침례교신학교를 방문하도록 예정이 돼 있었는데, 나는 쥬리히에 도착한 후 조그마한 여관 같은 호텔에 묵었다. 이층 방에 올라가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에 가서 세수를 하는데, 갑자기 기침이 났다. 그런데 기침과 함께 콩알보다 조금 큰 핏덩어리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는 계속 각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20세 때 폐결핵에 감염되어 고생하다가 완치됐었고 그 후 또 한번 재발했으나 약이 좋아 완치되었다. 그래서 폐결핵 증세를 잘 알고 있었다. ‘야단 났구나’하는 생각에 사로 잡혔으며 앞이 캄캄해졌다. 피곤에 지쳐 있었지만 그보다도 선진국에서는 폐결핵이 드러나면 강제 수용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 지는 것이다. 이틀 동안을 거의 먹지 못하고 외출도 못하고 누워 있으면서 계속 기도만 했다. 생각나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처절한 참회의 기도를 계속하였다.  이튿날 저녁, 갑자기 생각이 떠올랐다.
영국에 있는 샐윈 휴스 목사님이 티, 엘, 오스본이나 올랄 로버트 목사님과 같이 신유의 능력이 있는 분인데 영국으로 가서 같이 기도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다. 휴스 목사는 우리 선교회 헤몬드 총재와 가까운 사이여서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분이라 수첩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마침 그가 있었다.
 전화로 연락하여 시간을 맞추었다. 런던 공항에 도착하여 안내 카운터 앞에서 휴스 목사를 만나 목사님 댁으로 차를 몰았다. 차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혹시 피가 나올까봐 입을 가리고 물었다.‘목사님 내가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묻지 말고 기도 좀 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내가 물었다. 혹시 폐결핵을 꺼릴까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기를 꺼리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얼마 후 소파에서 내려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목사님은 약 3미터 떨어진 저켠 소파 앞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한국에서 온 형제가 몸을 다쳤답니다. 무슨 병인지는 묻지 말라 해서 나는 모릅니다.
 무슨 병이든 하나님 고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하며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소파에 다시 앉아 묻는 것이었다. ‘다 나았습니까?’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분의 얼굴표정이 좀 달라지더니 일어나 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큰 성경을 한 권 가지고 오더니 앉아 있는 내 앞에 다가서서 ‘이 책을 믿습니까?’하고 물었다. 엉겹결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그렇다면 당신은 고침을 받은 거요!’하였다. 나도 모르게 ‘그렇습니다’라고 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 ‘형제가 하나님 은혜로 고침을 받았으니 내일 오후 3시에 극장을 빌어 집회를 하는데 그 집회에서 설교를 해 주시오’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앞이 캄캄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호텔방에서 고민을 하였다. 말만 해도 피가 나오는데 설교를 하다가도 피가 나올 것이 뻔한 것이 아닌가. 가까스로 참고 힘든 기침이 심해지면서 몇 마디 하지 않아 설교가 중단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 오후 2시쯤에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정신없이 성경 한 권만 가지고 따라 나섰다. 극장 안에 1천 5백명 가까이 모인 것 같았다. 강단에 올라서서 앉았을 때 내가 경황 중에 이 집회를 위한 설교 준비할 것을 잊었으며, 또 아무런 원고도 가지고 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정말로 초조한 순간 순간이 흘러갔다. 나는 단에 불려나갈 무렵쯤 해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피를 토하다가 격리 수용소에 격리가 되든 이제는 당신의 뜻입니다.’라고 속으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5장을 열어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에 관해 나의 간증을 곁들어 증거하기로하였다.  
 나는 목사가 된지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수없이 설교를 하였지만, 우리 말로도 그때처럼 힘 있고 유창한 설교를 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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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원고도 없이 영어로 장장 50여분 동안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설교를 마치고 의자에 앉았을 때, 비로소 나의 목에서 흘러나오던 각혈이 완전히 멎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바지에 떨어졌다.”
  “그날 5시에 다른 그룹이 또 이 극장을 쓰도록 돼 있었던 모양이어서 3시 집회가 길어졌으므로 그 집회를 위해 좀 일찍 나온 분들이 설교를 듣게 됐던 모양이었다. 이들이 집회 후에 강단에 올라와서 휴스 목사님께 자기들 집회를 위해서도 설교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휴스 목사님은 그들을 나에게 보내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또한 집회를 하게 되었다. 또 한번 50여분의 설교를 은혜 가운데 마쳤을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 다음날 노르웨이를 향해 떠나기 전에 휴스 목사님과 다시 성령의 사역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휴스 목사님이 가볍게 웃으시면서 같이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그저께 모양으로 서로 다른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 성령의 영광스러운 강림의 체험을 하였다.”   
 박 목사님은 그 후 한달 동안 노르웨이에서 집회 인도하게 되었다. 그 집회들은, 명실공히 성령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뜨거운 집회들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며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