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CA 스토리
| ||
| | ||
| | ||
릴게임바다이야기 ㈚ 릴게임사이트 ┝
릴게임끝판왕 바로가기 go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바다이야기릴게임2 ▲ 6.25 당시 부산형무소 ⓒ 교도소연구소 중공군이 참전하자 청주형무소에서는 부역자들을 남쪽으로 이감시켰다. 1950년 12월의 손오공릴게임 쌀쌀한 날씨였다. 탑동의 청주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까지는 90리(36km) 길이었다. 1950년 12월 청주형무소 형무관들은 재소자들을 다그쳤다. "전부 운동장으로 나와!" 정봉춘(1916년생, 청원군 강외면 궁평1구)은 영문도 모른 채 운동장으로 나왔고, 형무관들은 재소자들을 모두 묶은 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이유는 릴짱릴게임 설명하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재소자들을 남쪽으로 이감시키기 위한 조치로 짐작했다. 형무소에 화물자동차가 두 대 있었는데, 한 대는 전시에 징발됐고, 다른 한 대는 고장이었다. 결국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봉춘을 포함한 정치·사상범은 간수장 이정문의 책임하에 걸어서 남일면 고은리와 문의면을 거쳐 신탄진으로 향했다. 그들의 걸 바다이야기프로그램 음걸이는 고문 후유증과 운동 부족, 영양 부족으로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고작 주먹밥 한 개였다. 설국열차 문의 못 미쳐 진눈깨비가 내렸다. 얼음 눈이 내리면서 얇게 입은 옷을 적셨다. 영하 10도의 날씨였다. 몸이 동태가 되어 밤 10시 30분경 신탄진에 도착했다. 학교 교실에 들어가 책걸상을 부수어 난로에 집어넣 릴게임몰메가 었다. 다음날 대전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했다. 대전형무소에서 이틀 밤을 잔 이들은 부산행 화물열차를 탔다. 지붕이 없는 기차 10량에 400명이 분산 탑승했다. 기차 안은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앉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기차는 부산까지 느림보행을 했다. 충북 도내 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재소자들이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로 하루 동안 기차 안에 서 있었다. 화물차 두 칸에 정치·사상범과 형무관 및 피난길에 오른 형무관 가족까지 화물차에 탔다. 기차는 콩나물시루 같았다. 소변도 볼 수 없었다. 결국 서서 오줌을 지려야 했다. 기차는 가다 서다 다음 날 아침 10경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역에서 화물차를 열었을 때 10여 구의 시신이 있었다. 얼어 죽고 장티푸스·콜레라로 죽은 시신이었다.(홍두표, <나의 여운>, 2006) 이때 재소자들을 인솔한 홍두표(1924년생)는 "부산형무소 화장실 길목에 수의를 입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못돼도 200구는 됐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시신은 아무것으로도 덮지 않았고, 날씨마저 추워 동태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전국의 형무소에서 온 재소자들의 시신이었다. 전염병과 영양부족으로 죽고, 얼어 죽은 시신이었다. 청주형무소에서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0년 12월과 1951년 3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재소자들을 부산형무소로 이감시켰다. 위의 글은 1차에 이감된 윤용원과 2차 이감에 인솔자로 부산까지 동행한 청주형무소 홍두표 형무관의 기록과 증언을 기초로 했다. 부산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은 경찰 수사와 미결수 시절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과 전염병으로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 결과 부산시 동대신동 2가 313번지 부산형무소에서는 수시로 시체가 나왔다. 당시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윤용원(1927년생. 청원군 남이면 행산리)은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리 오○○도 죽었다"고 한다. 청주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수감된 이들이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 얼어 죽고 밟혀 죽었다면 부산형무소에서는 전염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그런데 죽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청주·대전·공주형무소 등지에서 이감된 이들을 포함한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으로 하루에 수십 구의 시신이 나왔다. 윤용원은 "시신을 화물차에 볏짝 실 듯이 실었어. 시신을 형무소 뒷산에 매장했지"라고 증언한다. 우익인사 풀어준 사람이 빨갱이로... ▲ 아버지 정봉춘이 구금됐던 창고 앞에 선 정재철 ⓒ 박만순 "피고 윤용원을 무기징역 형에 처해 주십시오!" 검찰의 추상같은 구형이었다. 1950년 12월 1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윤용원에 대한 구형 공판이었다.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대한민국 군경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남한지역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수복 후 군경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부역자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복 직후에는 법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읍·면과 마을 단위에서 인민위원장이나 민청·여맹·농민동맹 간부를 맡은 사람을 즉결처형했다. 전라도나 충남·북 사례를 보면 실제 인공 시절 간부를 맡았던 이들이 처형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인공시절 간부를 맡았던 이들은 군경 수복 직전 몸을 피했다. '그대로 있다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며 월북하거나 입산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실제 군경에 의해 부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이들은 인공 시절 감투를 썼던 이들의 가족(代殺)이거나 하급 간부가 대부분이었다. 충북 충주군 엄정면에서는 부역혐의자 300~400명이 학살당했고, 청원군 가덕면에서는 약 100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때의 죽음은 재판 자체가 없었다. 무분별한 학살이 사회문제화되자 1950년 12월 1일 '부역행위특별처리법'이 제정됐다. 즉 인공 시절 적(북한)에게 협력한 이들을 처벌하는 법을 만든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의 법원에서는 부역자 관련 재판이 열렸다. 그렇다면 윤용원은 인공 시절 어떤 일을 했기에 무기징역을 구형받은 것일까? 청원군 남이면 행산리 윤용원은 인공 시절 완장을 찼다. 인공 시절인 1950년 8월 13일 남이분주소(남이지서) 분주소원으로 임명된 것이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0>, 1973) 분주소원은 피난 가지 못한 공무원이나 우익단체 구성원과 그 가족들을 체포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하지만 윤용원은 분주소원의 주 임무를 망각한 듯했다. 즉 분주소장이 지시로 잡혀 온 남이면 의용소방대장 강대동과 부용면에 거주하던 민철식 부부, 부용금융조합에 근무하던 박종학을 임의로 풀어준 것이다. 인공시절 우익인사 4명을 살려준 윤용원은 수복되자마자 빨갱이로 찍혀 붙잡혔다. 남이면 대한청년단장 최◯◯은 단원들을 데리고 와 "저 빨갱이 새X 잡아!"라고 지시했다. 지서장이 훈방 조치하자고 했지만 최◯◯은 "이런 빨갱이 새X는 콩밥을 먹여야 정신 차려요"라며 강경하게 나왔다. 결국 윤용원은 청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형을 구형받았다. 선고 공판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살기 위해 협력한 게 죄인가 ▲ 부산형무소에서 사망한 조갑구의 재감인명부 ⓒ 박만순 "김용각 동무를 인민위원장으로 임명합니다" 1950년 7월 20일 강내면 탑연리 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의 일이다. 강내면 인민위원장 취임식에 참석한 주민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내면 궁현리의 김용각(1898년생)은 보도연맹 소집 당시 몸을 피했던 이다. 그로 인해 강내지서장 김아무개는 그의 동생 김용립을 대신 체포했다. 김지서장은 "형이 있는 곳을 대라"며 구타를 했다. 심지어 펜치로 성기를 잡아당기는 성고문을 하기도 했다. 그런 전력이 있는 김용각이 인공 시절 강내면 인민위원장 감투를 쓰게 된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유족들은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고, 일부 사람들은 김용각이 '심한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그는 개인적인 보복을 하거나 악질(?)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8월 15일 인민위원장 사임 때까지 상급기관에서 지시한 업무를 수행했다. 판결문에 의하면 김용각은 부락(마을) 1호당 1일 1명씩을 복구대로 총 연인원 1천여 명을 동원해 미호천 철교와 인도교 수리 복구공사에 종사케 했다. 1950년 7월 30일경에는 제1차 의용군을 각 부락에서 40여 명을 모집해 인민군 전선에 보내고, 8월 2일 마초(馬草) 4천 여관을 각 부락 매호당 4관씩 할당했다는 것이다. 또한 8월 17일에는 강내면 농민동맹 위원장에 취임해, 상급기관으로부터 애국미 300석을 할당받아 각 부락별로 재할당해 수집했다. 김용각은 이러한 일로 무기징역 형을 구형받았다. 청원군 옥산면 금계리 곽면영(1914년생)은 청주시 노동당 위원장 신장식과 청원군 노동당 위원장 태한창의 권유로 옥산면 인민위원장에 취임했다. 곽면영은 1950년 7월 25일 노동당 본부인 황치현 집에서 과거 국민회(독립촉성국민회), 대한청년단 간부 등 30명을 반동으로 규정하고 처벌은 상부 지시에 위임한다고 결의했다. 또한 8월 15일부터 남하하는 인민군, 정치공작대원, 내무서원 4000여 명에게 식사, 식량, 부식물, 연초 등을 제공했다. 이후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8월 23일경 각 부락 민청원 중 50명을 의용군으로 모집해 전선에 보냈다. 8월 25일경에는 의용군 30명을 2차로 모집해 전선에 보냈다. 8월 20일부터 4일간에 걸쳐 각 부락에서 고추장, 된장, 소채(채소), 감자, 계란, 양계 등을 5~6회 소집해 우마차 10여 대로 의용군 훈련소인 강서국민학교로 운반했다고 한다. 곽면영은 1950년 12월 29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열린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최종 선고공판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청주시 우암동의 김영빈(1929년생)은 6.25 후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직업동맹 전국평의회 대마공장 청주분회 분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8월 15일부터 9월 17일까지 대마공장 관리위원회 위원장 서태원의 지시로 공장 내의 기계 일체를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기계를 훼손했다고 한다. 8월 하순경에는 상급자의 지시로 공장 내의 주요 기밀 문서를 산업성에서 파견된 자에게 제공했다. 그는 이런 활동으로 인해 1950년 12월 27일 청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형을 구형받았다. 선고형량은 확인되지 않는다. 즉 면인민위원장을 비롯한 부역자로 규정된 이들의 주요 죄상은 의용군 모집, 인민군에게 식량 제공, 파손된 교량과 도로를 보수하는 일이었다. 인민군의 강요로 누군가는 책임질 수밖에 없는 일을 했다고 사형과 무기징역 형을 구형받았다. 과연 인공체제에서 살기 위해서든 능동적으로 했던 인민군에게 협력한 활동으로 사형, 무기징역 형을 받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인공 시절 감투를 쓴 것이 죄가 되어 무거운 형량을 받은 것이 적절한 것이었냐의 문제는 덮어둔다고 친다 해도 남는 문제가 있다. 징역 10년이든, 20년 형을 받은 이들이 형무소에서 죗값을 받은 후에는 사회로 안전하게 복귀해야 한다. 그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 부역자로 낙인찍힌 이들은 그러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인공 시절 청주시인민위원회 재무과원이었던 조갑구가 그렇다. 그는 인공 시절의 활동으로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부산형무소에 입소한 지 56일 만인 1951년 3월 15일 고문 후유증과 영양부족,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