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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VOCA본부 : 박성기목사

[ 설교 ]

 
로마書의 歷史的. 社會的 背景

로마書의 歷史的. 社會的 背景

로마書는 바울이 그의 3차 傳導旅行을 끝내기 전 고린도에 3個月 머물러 있으면서 쓴 片紙로서 海運業을 하던 겐크레아의 뵈뵈 자매편에 로마敎會에 傳達되었다. (행 20:1-6. 롬16:1)

바울은 莫甚한 饑饉으로 苦生하는 예루살렘 敎會를 돕기 위해 마케도니아, 아케아아 지방 敎會들이 獻金한 救濟 獻金을 傳達하기 위해 그 地方 敎友 8명과 예루살렘을 향해 고린도를 出發하기 전에 이 片紙를 完成한 것같다.
(행 2:4, 24:17)

그런데 바울이 이 片紙를 쓰게 된것은 여러 目的이 있었지만 우선 그가 로마교회를 訪問할 것을 計劃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로마 訪問을 準備하기 위해 이 片紙를 썼다고 할수 있겠다.  그는 로마에서 잠깐 머물다가(롬 1:10-12) 로마교회의 도움을 얻어 새 宣敎地인 스페인으로 갈 計劃이었다. 롬 15:24

로마서의 內容을 살펴보면, 우선 바울이 이 片紙에서 그가 理解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信仰과 그리스도인의 實生活을 條理있게 說明하고 있는 것을 본다.

1장 初頭에서 로마 敎友들을 問安하고, 그들을 위해 祈禱하고 있음을 想起 시키며 또 이 書信의 命題가 以信得義임을 밝힌다.(롬 1:17)

그리고 그는 1:18-3:31에서 유대인이나 異邦人이나 모두 罪■아래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義롭다함을 입는다는 사실을 說明하고 4장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새 生命을 얻음으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關係를 갖게 된다고 믿는자는 하나님과 和睦하고 罪와 滅亡의 權勢에서 自由를 얻는다는 事實을 說明한다.

5-8장에서는 하나님의 律法의 目的과 그리스도안에 있는자에게 定罪가 없으며 聖靈의 能力으로 罪와 死亡의 法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라는 것을 宣布한다. 

 그리고는 9:1-11:36에서 하나님이 人類 救援을 위해 가지신 計劃과 유대인과 異邦人이 어떻게 聯關되어 있는가에 대해 詳述한다.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버림으로 救援이 異邦人에게 臨하였으나 유대인이 끝까지 그리스도를 否認하지 않을것이라는 結論을 내린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하며 그리스도인과 國家, 그리스도인과 이웃, 그리고 良心問題에 관해 說明한다.  그리고 個人的인 問安과 하나님을 讚揚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序論과 命題  1:1-17
         救援의 必要性 1:18-3:20
         하나님의 救援(方法) 3:21-4:25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生命 5:1-8:39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計劃 9:1-11:36
         그리스도인의 삶 12:1-15:13
         결언과 문안 15:14-16:27


로마서를 쓴 후의 바울

바울은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을 向해 떠나면서 쓴 片紙(로마서)에서, 서로의 有益을 위해 로마에 잠깐 들렸다가 남이 닦은 터 위에 집을 짓지 않기 위해 새 宣敎地를 찾아(롬 1:10-12) 스페인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밝혔다.(롬 15:24)

그러나, 주님은 바울이 로마에서 福音을 전하기를 원하고 계셨다.(행 23:11)  結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많은 曲折 끝에 2년 이상 로마에서 머물면서 주께서 願하신대로 福音을 전하게 되었다.(행 28:30, 31)  

바울이 罪囚로 로마에 끌려 온 것이 61년이며, 63년 봄에 釋放되었다.  그리고는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과 빌립보를 訪問하고, Nicopolis에서 겨울을 지났으며, 64년 봄에 Spain으로 떠났다.   

途中에 로마에 들려 베드로를 만나고 協議했으며, 바울이 Spain에서 宣敎하고 있을때 로마의 大火災事件이 일어났다(64년 7월).   64년 10월 수많은 誣告한 그리스도인이 이일로 인해 殉敎하였다.(네로)  베드로도 이때 殉敎하였다고 전한다.

66년 바울이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도중 逮捕되어 66년 말이나 67년 초에 로마에서 殉敎(斬首)하였다.

66년에 팔레스틴에서 유대와 로마의 慘酷한 戰爭이 일어나 70년에 마침내 예루살렘이 廢墟가 되고 유대 국가는 解體되었다.

로마 歷史 槪觀

로마서가 어떤 脈絡에서 쓰여졌는가 하는 것을 理解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이 片紙를 쓸때의 社會的 背景뿐 아니라 로마帝國의 歷史를 槪觀하는 것도 重要한 일이다.  이는 로마서 뿐 아니라 基督敎를 理解하는데 必要 不可缺한 일이다.

古代 로마

BC 2000년경 인도유럽(Indo European)言語를 使用하는 部族들이 북쪽과 동쪽에서 이태리 半島로 移住하기 시작했다.

言語學者들의 分析에 의하면 일차로 라틴部族(Latin)과 베니티 部族(Veniti), 그리고 시켈部族(Sicels)등이 때를 같이해서 移住해 왔으며 오스칸部族(Oscan)과 암부리안部族(Umbrian)이 그 뒤를 이어 移住해 왔다.  이들은 靑銅文化를 가지고 왔다.

BC 1000년경 또 다른 인도유럽 言語를 쓰는 不足이 다늅(Danube)지방에서 鐵器文明을 가지고 移住해 왔다.  이들은 모두 旣存 土着民들과 섞여 3대 勢力圈을 形成하였다.

北쪽에는 암부리안部族(Umbrian)이 勢力을 形成하고 南쪽에는 샘 나이트部族(Samnite, Sabinus)이 定着하고 中部 Tiber平原에는 라틴部族(Latin)이 定着했다.   

BC. 900년경 小 亞細亞에서 아직도 그 根本을 잘 모르는 또 하나의 部族이 이태리 半島의 中部海岸 地方으로 侵入해 들어왔다.  이들이 古代 統一 로마를 建設하는데 많은 貢獻을 한 에트리스칸部族(Etruscans)이다.  이들은 다른 部族들보다 開明한 部族이었다.  

로마 都市 國家 建設(BC. 753)

傳說에 의하면 로마 都市國家가 建立된 것은 BC. 8-7세기에 팔레틴(Paletine), 에스퀴린( Esguiline), 카피토린(Capitoline)등 7개 丘陵(7 hills)에 定着한 部族들이 聯合해서 都市國家 로마를 建國하고 BC. 753에 Romulus가 初代 王으로 卽位했다고 한다.

그들이 聯合하게 된것은 交通, 經濟등의 理由도 있었으나 그 보다도 小 亞細亞에서 侵入해 온 에트라스칸 部族과 對抗하기 위함이었다는 說이 무게를 가진다.

Rumulus가 初代王으로 推戴되고, 그후로 Pompilius, Tullus Hostilus, Ancus Martius까지 王朝가 이어진다.

에트라스칸 王朝 建立(BC. 600-509)

Etruscan部族이 서서히 勢力을 擴張해 오다가 BC. 600년경에 와서 로마를 占領하고 Etruscan 王朝를 建立했다.  Targuinius Priscus가 初代 王으로 卽位하고 Servius Tullius가 그 뒤를 잊는다.

Tullius대에 와서 라틴 都市國家들과 條約을 맺고, 周邊 部族國家들이 로마를 首席 都市國家로 受容하게 되었다.

그러나 3대 Targuinius Superbus대에 와서 Latin 系列의 貴族들의 叛亂이 일어나 BC. 509년에 Targuinius Superbus가 追放되었다.  그후 로마는 貴族 共和國으로 탈바꿈하였다.

여기서, 特記 할것은 Cloaca Maxima라는 下水溝가 Etruscan 王朝때 建設됐다는 일이며 이 下水溝를 아직도 그대로 使用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 貴族 共和國의 誕生(BC.509-28)

이렇게 誕生한 共和國은 貴族 中心의 共和國이었다.  2명의 執政官과 上院議員들이 이 貴族(Patrician) 階級 政治를 폈다.  그러나 戰爭이 繼續되는 時期였음으로 平民들의 協助(Plebeian)가 절실하였다.  平民들을 軍將校로 任命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군에 服務하는 平民 將校들은 平民의 權利를 擁護하는데 큰 몫을 했다.

向後 2世紀間 兩 階層사이에 衝突이 繼續되었으나 內亂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平民들은 非公式 平民會等(Concilium Plebis, Comitia Centuriata)을 組織하여 平民의 權利를 代辯하고 護民官(Tribunes 10명)을 選出하여 執政官과 協商하였다.

이러한 平民運動은 平民들의 權益을 위해 로마法을 文書化(12표법)하고 執政官과 上院議員 被選權을 平民들이 獲得하는데까지 發展하였다.

大國으로 發展(BC. 509-133)

로마가 509-133 사에에 大國으로 發展하였는데 이렇게 發展하게 된데는 周邊 事情도 많은 作用을 하였다.

當時의 周邊政勢를 살펴볼때, 그리스와 에트라스칸 그리고 칼타고가 勢力 다툼을 하다가 모두 國力을 消耗한 狀態였다.  특히 칼타고는 가장 威脅的인 敵이 그리스라고 생각하고 로마-그리스 戰이 始作됐을때 칼타고가 로마를 支援하여 그리스를 敗亡시켰다.(270 BC)  그러나, 그것은 칼타고의 큰 誤算이었다.
왜그런고 하면, 그리스를 征服한 로마는 곧 칼타고와 3차에 걸친 大戰을 치루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칼타고(BC. 857 -146)

칼타고는 피니키아의 貿易 植民地로서 BC 857경에 아프리카 북단에 建立된 都市國家였다.  그들은 海路를 通한 貿易에 能熟하였다.  그들의 海運業은 西地中海는 말할 것도 없고 서쪽으로 大西洋에 이르기까지 北쪽으로는 발틱海域에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에만 熱中하고 餘他 問題는 度外視 하였다.  그들은 傭兵으로 軍隊를 組織하였고 厚한 報酬를 支拂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國家에 대한  意識 나 忠誠이 貧弱하였다.  이러한 칼타고가 로마의 戰爭 相對國으로는 力不足이 아닐수 없었다.

제 1차 포에니戰爭(The 1st Punic War, BC. 264-241)

   BC. 264년 시실리섬의 領有權 是非로 시작된 이 戰爭에서 陸地戰에만 익숙해 있던 로마군이 칼타고의 海軍을 당해 내지 못했다.  軍艦이라고는 없었던 로마군이 100척의 軍艦을 建造  하여 싸웠으나 20萬名의 兵力을 잃었다.  그러나 屈하지 않고  새로운 艦隊를 建造해서 마침내 BC. 241년에 이 戰爭을 勝利  로 끝내고 시실리섬을 占有하였다.

제 2차 포에니戰爭(BC. 218-202)

    칼타고는 屈하지 아니하고 스페인에다가 國家 기틀을 옮길려고 試圖하였다.  우선 한니발(Hannibal) 將軍을 시켜 로마와  同盟을 맺고 있는 스페인 都市(사군툼)를 功略함으로 戰爭을  일으켰다.(BC. 218) 한니발은 로마의 敵對國인 골(Gaul)族과  그리스가 支援해주고 또 로마 同盟市들이 背信해서 칼타고에게 同調해 줄것을 希望하면서 6萬名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進軍하였다.

    한니발이 얻어낸 支援은 미미하였지만은 그는 적은 숫자로  숫적으로 優勢한 로마軍을 大破하였다.  특히 칸나(Cannae)  戰에서는 4萬名의 한니발군이 8萬名의 로마大軍을 거의  全滅시켰다.  그러나 끈질긴 로마 市民들의 抗爭의 脈을  끊어놓지는 못했다.  

    반면 로마는 戰略을 바꾸어 스키피오(Scipio)將軍을 시켜
    칼타고 本土를 侵攻케하였다.  칼타고는 한니발將軍을
    스페인에서 本國으로 불러 스키피오 將軍을 對抗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자마(Zama)大戰에서 大敗하고
    2차 포에니 戰爭은 休戰條約으로 幕을 내렸다.  한니발은
    追放되어 소아세아로 避身하였으나 로마의 追跡을 避할수
    없어 自決하였다. (BC. 183)

제 3차 포에니戰爭(BC. 149-146)

    칼타고가 貿易으로 國家를 再建하자 BC. 49년에 로마軍이  다시 侵攻해서 3次戰이 始作되었다.  로마軍은 2년간 칼타고를 包圍하고 있다가 BC. 146년에 이르러 浸透해 들어가 6일 간에 걸친 血戰에서 칼타고인을 全滅시키고(25萬 人口中   20만명을 殺害하고 5만명은 奴隸로 팔았다.) 都市는 불태웠으며 耕作地에는 소금을 뿌려 다시는 耕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리하여 BC. 100년경에는 都市國家 로마가 全地中海 沿岸을 支配하는 帝國이 되었다.

內 亂

    天下를 平定한 로마는 새로운 問題들에 逢着하지 않을수 없었다.  高級 公務員들의 腐敗, 享樂의 追求, 그리스 文化의  流入, 富裕層의 獨占慾, 歸還兵들의 處遇問題, 都市로 모여든 失業者들의 問題등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히 작은 都市國家를 運營하던 로마上院이 廣闊한 大帝國을 統治하기 에는 力不足이었다.

    그러나 旣得權을 가진 上院議員과 少數 富裕層이
    切實하였었든 改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를 坐視할수 없었던 테베리우스 그라코스와 가이오스  그라코스(Tiberius Gracchus와 Gaius Gracchus, Zama전의  英雄 Scipio 將軍의 孫子들)가 改革을 試圖하였으나 두 사람다 暗殺당하자 國內 事情은 極度로 惡化되어 드디어  內亂으로 이어졌다. 

內亂의 第 1段階(BC. 88-78)

    BC. 88년에 소아세의 小國 폰투스(Pontus)國이 로마에 宣傳   布告를 하였다.  當時의 通例를 따라 派遣 司令官을 上院에서 두 사람의 執政官 중에서 심지를 뽑아 選定하였는데 수울라(Cornelius Sulla)가 選定되었다.  그러나 外交 等 중요 事項은 下院의 決議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理由로 下院議員들이 이를 不服하고 가이우스 마리우스(Gauis Marius)를  大將軍으로 選定하였다.  마침내 兩 陣營은 內戰을 일으켰다. 10년간의 內戰은 수울라 陣營의 完全 勝利로 끝나고 수울라는 그의 任務를 마치고 BC. 78에 世上을 떠났다.

內亂의 第 2段階(BC. 49)

    10년간의 內亂은 內分과 慘狀과 不滿을 深化시켰다.  로마는  다시 强力한 統治者가 나와 줄것을 渴求하였다. 이때에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將軍이 登場한다.  BC. 70년에  執政官에 選出된 폼페이는 東方으로 그의 領土를 유프라테스 (Euphrates) 강까지 넓혔다.

    그후 BC. 59에 율리우스 카에사(Julius Caesar, 유리시사)가 執政官에 選出되어 BC. 50까지 폼페이와의 協力關係를 잘 維持하였다.  특히 그는 서쪽으로 골族을 征服하고 북쪽으로 라인강까지 國土를 넓혔다.

    그러나 BC. 49 Pompey가 上院과 合勢하여 Caesar를 謀陷하여 그의 軍事 指揮權을 剝奪하고 麾下의 軍隊를 武裝解除  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Caesar는 로마를 향해 進軍하게  되었고 그는 로마의 實質的인 統治者가 되었다.

    그는 BC. 49-44까지 5년간의 짧은 期間동안 統治하였으나 그 業績은 컸다.

     1. 上院의 權限을 弱化시켜 特權層의 橫暴를 막고
     2. 太陽曆을 定立시켰으며,
     3. 이태리 半島外에 居住하는 자에게도 로마 市民權을 賦與 

 

 하므로 帝國內에 居住하는 자들이 로마人으로서의 所屬 感과 同質感을 갖게함으로 國家經營에 많은 걸림돌을 除去하였다. 

 그러나 그는 44년 3월 15일 反對勢力에 의해 上院議事堂에서 被殺되었다.

內亂의 第 3段階(BC. 31-28)

    Caesar가 死亡한 후 그의 養子(조카손자) Gaius Octavius가  Marcus Antonius와 손을잡고 叛軍들을 鎭壓하고 向後 10년 간 寡頭政治를 펴 나갔다.

    그러나 안토니우스(Antonius)가 애굽의 클레오파트라
    (Cleopatra)에게 빠져 로마 領土를 分割해 준 것을 契機로  옥타비우스(Octavius)는 오랜 歲月동안 감추어온 野望을  成就할 機會를 얻게되어 옥타비우스는 안토니오를 賣渡하게  되었다.

    BC. 31년 악티움(Actium) 海戰에서 안토니오는 大敗하고
    에집트로 避身하였으나 그곳에서 自決하였고 BC. 30년에
    알렉사드리아가 陷落될때 크레오파트라도 自決하였다.

Augustus皇帝(BC.27 - AD.14)

    로마로 凱旋한 Octavius에게 上院은 Augustus(尊嚴者)라는      
    稱號를 주었고 BC. 27년에 로마帝國의 皇帝로 君臨하게 되었다.  

    그는 上院에게 상당한 權限을 賦與하였고, 下院에는 立法權      
    을 賦與하였다.

    이렇게 上下院에게 權力을 分配해 주었으나 그가 絶對 權力      
    者로 君臨할수 있었던 것은 軍 統帥權(imperater)을 掌握하      
    고 또 로마 各省의 總督들을 完全 掌握함으로 可能하였다. 

    그는 그의 呼稱을 Princeps(元首, 同等者中 一人者)라 稱하고      
    所謂 말하는 元首 政治(Principate)를 폈다.

    그가 BC. 27에 卽位하여 AD. 14년까지 로마를 統治하였는데      
    그는 예수님이 誕生하실때 戶籍令을 내려 요셉과 마리야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내려가게 한 張本人이기도 하다.      
    (눅 2:1)

    그가 死亡한 후(AD. 14) 그의 後孫중 네명의 皇帝가 世襲을      
    받아 AD. 69년까지 統治하였다.

         Tiberius - (디베료 AD. 14-37) 눅 3:1
         Claudius (AD. 41-54) 행 11:28, 17:7, 25:8, 11, 12, 21,                                    
         26:32, 27:24,  28:19
         Caligula-(37-41)
         Nero AD. 54-68

         이들 네 皇帝는 初期 基督敎와 密接한 關係를 가진
         자들이다.

프레비안 王統(Flavian Emperors)(AD. 68-98)

    Caesar 王朝가 AD. 69년에 네로 皇帝를 마지막으로 끝나고      
    Flavian朝가 代를 이었다.  그후 30년간 健全한 發展을 하였      
    으나 AD. 98년 Nerva 皇帝를 끝으로 Antonine 王朝로 權座      
    를 넘긴다.
              Galba  68-69
              Otho  69
              Vitelius  69
              Vespasian  69-79
              Titus  79-81
              Domitian  81-96
              Nerva  96-98     

안토닌 王統(Antonine)(AD. 98-180)

    로마 帝國은 이 時期에 繁榮의 絶頂에 이르렀다.  이 王朝의      
    王들만큼 獻身的인 王들은 없었다.
              Trajan (98-117) 領土擴張, 建築
              Hadrian (117-138) 行政改革에 置重
              Antoninus Pius (138-161)
              Marcus Aurelius (161-180) 哲學을 좋아하는
              王으로 有名하였으나 167년부터 게르만족이      
              侵略해옴으로 죽을때까지 戰爭에 시달렸다.

    아우레리우스(Aurelius)皇帝 死後 1世紀간 로마는 다시 內亂      
    과 侵略의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그후 180-284년 사이에 27명의 皇帝가 卽位하였는데 그들의      
    짧은 統治는 284년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皇帝(284-305)에      
    의해 中斷되었다.  디오클레티안 皇帝는 共和國이 누리던
    모든 自由를 剝奪하였고 上院의 權限을 沒收하였다.

    그는 로마 帝國을 둘로 나눈 張本人이며 동쪽은 자신이 統治      
     하고 서쪽은 막시미아노스(Maximianus)로 하여금 統治하게      
     하였다.

콘스탄틴 대제(AD. 306-337)
    
    콘스탄틴 大帝(Constantine, the Great, 基督敎를 로마 國敎      
    로 宣布한 皇帝)는 먼저 서로마를 統治하다가 후에 全國土를      
    統治하였다.  그는 AD. 313년 6월 15일 所謂
    말하는 미라노 勅令이라는 宗敎 寬容政策을 宣布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가 330년에 로마 首都를 비쟌티움        
     (Byzantium, Constantinople)으로 遷都하므로 로마 帝國은      
     本格的으로 兩分되기 始作하였다.

    그리고 AD. 395년 Theodosius 皇帝가 동서 로마를 自身의      
     두 아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로마는 永遠히 兩分되는 運命에      
     놓이게 되었다. 


   서로마의 滅亡(AD. 476)

    AD. 476년에 서로마는 마지막 皇帝인 Romulus Augustulus      
    를 野蠻族 族長인 Odoacer가 廢位하므로 永遠히 滅亡하였다.

유스티아누스 皇帝(AD. 527-565)
    
    특히 유스티니안(Justinian 527-565) 皇帝는 옛 로마의 榮光      
    을 되찾기 위하여  많은 努力을 하였고 四方에서 侵略해
    오는 外侵 勢力을 成功的으로 막아내었다.  

비잔틴 帝國으로 國號 改稱
    
    동로마는 7세기에 이르러 비쟌틴(Byzantine) 帝國으로 國號      
    를 改稱하고 國論을 統一하기 위해서 人種의 混血을 勸獎
    하고 또 그리스어를 使用하게 하였다.

    그러나 政治社會의 不安으로 인한 騷擾와 內亂 그리고 繼續      
     되는 外侵으로 더이상 비쟌틴 帝國은 버틸수 없었다.  

로마의 滅亡
    
    그러던 중 터키의 이슬람군이 16만 大軍을 이끌고 侵攻해
    왔을때 컨스탄틴 8세는 9천 兵士를 거느리고 戰鬪에 임하였      
    으나 마침내 戰死하고 1000년 王國은 幕을 내렸다. 


    BC.2000-1500 인도유럽 語族을 使用하는 部族들이 북쪽                      
    과 동쪽 地域에서 이태리 半島로 移住

                  Latin, Veniti, Scels (제1파)
                  Oscan, Umbrian (제2파)
                  靑銅文化 Terramara 文化 形成

    BC.1000경    또 다른 인도 유럽 語族, 다늅地方에서 移住                    
    3대 勢力圈 形成

                  Umbrian 북쪽
                  Samnite(Sabinus)남쪽
                  Latin 中部 平野

    BC. 900경     소아세아 地方에서 中部海岸으로
                  Etruscan 部族 侵入

    BC. 753경     로마 7구능(丘陵) 部族들이 聯合
                  都市 國家 로마를 創建

                  初代王 Romulus 卽位                  
                  Romulus ■ Pompilius ■ Tullus Hostilus
                  ■ Aucus Martius

    BC. 600경     Etruscan족이 로마를 占領 王朝 建立

                  Targuinius Priscus ■ Selvius Tullius ■
                  Superbus.

                  Tullius 대에 周邊國이 로마를 首席 都市國
                 으로 受容

    BC.509-133경 Targinius Superbus의 追放. 貴族 主導
                 共和國 建立, 2명의 執政官, 上院議員(모두                      
                 貴族 Patrician 出身)이 統治
                  BC. 133 小아세아 Pergamum國 自進 獻納 


     ◉ 平民運動 : (Plebs)
      
       貴族이 統治했으나 戰爭을 위해 平民을 動員하지 않을수        
       없었고 平民 出身 將校들은 平民의 權益을 擁護하는데
       앞장섰다.  그들은 平民會등(Concilium Plebis, Comitia          
       Centuriata)을 組織하고 護民官(Tribune)을 選出했다.

    BC. 270      그리스 敗亡(칼타고의 支援)

    BC. 264-241   1차 포에니戰爭(Punic war)
                  
                  칼타고는 BC. 857년에 피니키아 植民地로
                  創建됨.  海運業 從事, 傭兵

                  이 싸움에서 海戰에 서툰 로마군은 20만명을
                  잃었으나 끝내 勝戰하였다.

    BC. 218-202  2차 포에니戰爭

                 한니발이 스페인에 있는 로마 同盟 都市인
                 사군툼을 攻擊하므로 開戰되다.  스키피오
                 장군과 자마에서 對決하였으나 敗北하다.

    BC. 149-46    3차 포에니戰爭

                  카르타고가 貿易으로 國家를 再建하자 로마군                    
                  은 다시 카르타고를 潰滅시켰다.

內 亂 期

    統治 能力 不足, 憲政紊亂, 腐敗, 行樂追求, 富裕層 橫暴,
    歸還兵 處遇, 失業者 問題로 昏亂에 빠짐
    Gracchus兄弟의 改革安 失敗
  
    1段階  Cornelius Sulla와 Gaius Marius 陣營의 血鬪 10년   

     2段階  Gnaeus Pompeius 執政官(70)과 Julius Caesar(59)의            
    暗鬪. BC. 49 시사의 로마入城. BC. 44 被殺

    3段階  Marcus Antonius와 Gaius Octavius의 Actium海戰

    Augustus 皇帝 統治 BC. 27-AD. 14
            Princeps - Principate

    BC. 27-AD. 68 시사 王統(Caesar)
    AD. 69-98      프라비안 王統
         98-180     안토닌 王統
         180-284    27명의 王들
         284-305    디오클레티안 皇帝, 로마分離
         333. 6. 15   콘스탄틴 대제, 宗敎 寬容 政策 宣布
         330         Byzantinum으로 遷都
         395         Theodosius 동.서로마 아들들에게 繼承
         476         Romulus Augustulus 廢位 서로마 滅亡
         527-565    Justinian 皇帝의 再起 運動
         650-?      동로마를 Byzantine 帝國으로 國號 改稱
         1453       콘스탄틴 8세 戰死, 비쟌틴 帝國 滅亡 


로마書의 社會的 背景

AD. 1世紀의 로마 社會는 아구스도 皇帝(BC. 27-AD. 14) 卽位 이후 政治, 社會, 經濟面에서 繁榮과 安定을 누리던 때다.

이 時期(AD. 1世紀)의 로마 社會의 構成

  1. 上院議員 階層(Senatorial Class)은 人口의 1%의 1/2000에        
       該當하는 수로서 약 30명으로 計數할수 있다.

  2. 騎士階層( Equestrians, Knights) 이들은 人口의 1%의 1/10      
      에 該當하는 수로서 약 6,000명으로 計數된다.

  3. 小數貴族層

  4. 自由民 및 奴隸에서 解放된 自由民

  5. 奴隸
    貴族層에 속하는 자는 商工業에 從事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일반 勞動을 尊嚴性을 해치는 일로 看做했을 뿐 아니라 不
    道德한 것으로까지 생각하였다.  相續財産 賃貸料 돈놀이들      
    이 그들의 收入의 源泉이었다.

    1世紀말에 와서는 전 이태리半島 人口가 600만명이었는데 그      
    중에 奴隸가 200만명이었다 한다.

    BC. 50-AD. 150년 사이에 로마 帝國은 每年 50만명의 새      
    奴隸를 必要로 했다.  그 理由는 奴隸를 赦免하는 境遇와 또      
    도망치는 奴隸의 수를 補充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 슬픈일은 自由民이 된 前 奴隸들이 經濟的으로 전보다 더      
    어려운 地境에 처하기 때문에 自由民이 되어도 다시 主人집      
    에서 奴隸와 같은 生活을 하는 例가 많았다. 

    奴隸는,

      1) 戰爭捕虜
      2) 나면서 奴隸 身分을 갖고 나는자(어머니가 奴隸면)

         태어나자 다른 사람이 데리고 가서 奴隸로 키움으로
         家族이라는 槪念이나 紐帶가 없어진다.

      3) 빚을 졌을때, 自身이나 子女를 奴隸로 판다.
      4) 棄兒, 특히 女子아이일 경우, 家族의 수를 줄이기 위해
         버림.
      5) 男子는 女子보다 10세 정도 늦게 結婚하였다.(30세)
         그리고 性的節制는 로마 道德 項目에 들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奴隸나 娼女 相對의 性生活을 통해 私生兒가
         태어나고(Unwanted) 이들은 棄兒가 되어 奴隸가 된다.

      6) 奴隸가 自由를 얻어도 대개의 경우 前 主人과의 紐帶를
         가져야 하며,

      7) 奴隸가 하는 일은
         . 農事, 鑛夫, 기타 천한 일들이다.
         . 奴隸의 結婚은 不法

      8) 皇帝에게 直屬한 奴隸는 대개 有能한 者 들이었다.
        
        . 行政에 直接, 間接으로 關與하였고
        . 市民과 結婚할 수 있는 特權도 주어졌고
        . 自由民으로 身分을 얻을수 있는 特惠 機會가 많다.
        . Aristsbnlus나 Narcissus家門의 眷屬들 중에는 이런
          분들이 많았다.

로마 社會의 社會組織

  1. 政治組織(Politeia) 皇帝를 頂上으로 하고 上院과 下院이
     國事를 審議하는 立憲君主制 

    1) 一般市民은 參政도 하지 않았지만 政府의 제도권
        내에서의 行動에 대해서 별다른 規制도 받지 않았다.

     2) 그리스도인은 公集會 場所에서 모이지 않고 주로 집에서
        모임으로 基督敎人으로서의 生活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았다.  다만, 騷擾事態가 일어났을때 政府가 介入하게        
        된다.

     1) 행 16:16-24, 19:23-41
        AD. 49 Clandius 皇帝의 勅令에 의해 유대인이 追放됨.

     2) BC. 64 Nero의 迫害
        네로皇帝가 54년에 卽位 했을때에는 나이가 어렸음으로        
        元老 長老들이 옆에서 攝政을 했음으로 國家가 健全하게        
        運營되었으나 60년 이후에 네로는 暴君으로 변하였다.

  2. 家族制度(Oikonomia)

     家庭은 로마社會의 基礎單位

     로마의 家庭은 大家族을 選好하는 傾向이 있었으며 宗家의      
     最高齡 男性이 絶對 權限을 가진 家長이 되고 그 밑에 여러      
     家族들(Families)이나 개인들이 모여 家庭을 이룬다.

     그들은 같은 집이나 옆집에 居住하며 같은 職業에 從事
     한다.(農,商,工)  여자는 주로 안에서 일을 하고, 남자는 밖에      
     서 일을 한다.

     家長이 家族의 生死權을 包含한 絶對權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를 上納했을때 고개를 돌리면 거리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딸이 結婚해서 남편 膝下로 가느냐 아니면 親庭 家族이
     되느냐는 것이 決定되면 그대로 이 法에 의해 處理된다. 

      長子가 相續을 받으나 남손이 없을때는 入養을 한다.  
     이런 일은 왕가에서도 왕왕이 있었다.
     롬 8:12-17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身分을 絶對 權限이
     주어지는 養子에게 比喩했다.

     친구나 事業 連繫者나 自由를 얻은 前 奴隸들도 誓約에
     의해 家族이 된다.  宗敎도 家長이 정한다.

  3. Koinonia 任意 聯合會(Generosity, Altruism, fellow-feeling,
              participation)

     宗敎團體는 아니나 會員이 될때에 入會儀式(沐浴齋戒,
      禁食)등을 행한다.

     유대교는 任意團體로 認定을 받았기 때문에 基督敎가 그
     우산밑에서 成長할 수 있었다.

     로마 敎會는 Oikonomia와 Koinonia 사이에서 많은 葛藤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로마人의 生活

貴族들은 經濟生活에 어려움이 없었음으로 敎育을 받고, 藝術 分野에 趣味도 가질수도 있었다.  그러나 庶民들은 貴族들을 위해 存在하는 것이므로 庶民들의 生活에 대해 귀족들은 無關心했으며  그들의 文書에 庶民들의 생활에 대해 記錄을 남기는 일이 없었다.  

가난한 庶民들은 生活의 餘裕가 없었고 敎育을 받을 機會도 없었고 자신들의 生活을 記錄할 處地도 못됐다.  따라서 庶民들의 生活에 대해서는 資料가 많지 않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情報는 그 당시의 墓碑에서 얻을수 밖에 없다. 

Sandra Joshel이 그 當時의 墓碑 6,167개를 調査해 보았다.  
그 중 1/6에 該當되는 墓碑에 職業이 記入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주로 奴隸나,  自由를 얻은 奴隸가 자기의 職業을 자랑스럽게 言及하고 있으나 一般 自由市民은 자신의 職業을 言及하지 않는 傾向이었다.

  奴隸들에게 있어서는 일이 그들에게 주는 意味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祖國도 家族도 없었으며 자신이 가진것은    
  자신의 몸과 자신이 익힌 技術,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이 全部    
  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 建築業이 112명, 生産業이 331명, 販賣業이 108명,
   金融業이 42명, 設計.醫師.産婆.敎師가 120명, 技能(美容, 演藝)    
   이 75명, 執事일 321명, 交通 系統에 從事하는 자 55명, 行政.
   財政管理.秘書가 306명으로 集計되었다.

로마 社會의 哲學과 宗敎

당시의 로마 社會에는 宗敎에 대한 拒否感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基督敎가 전파되어 왔을때는 로마에는 이미 헤일수 없는
宗敎로 가득차 있었다.  어떤 學者는 그 당시 로마 市民들은
현재 미국인이 누리는 宗敎 自由 以上의 自由를 누리고 있었다고 主張하는 자도 있다.

그들의 宗敎는 多神敎的이며, 이는 많은 宗敎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이 여러 宗敎를 받아 들일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神들이 世界를 支配하며 누구를 祝福할 수도 있고 헤칠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많은 神과 친해 놓는것이 有利하다고 생각하였다. 

 

유대교를 除外한 다른 宗敎 즉, 이교도(異敎徒)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宗敎와 倫理生活을 結付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倫理生活을 주장한 것은 哲學者들이며 祭司長들은 倫理를 强要하지 않았다.  그들의 神은 人間보다 强者로 描寫되나 同時에 그 神들 자신이 無道德(Amoral)한 神들이었다.

로마의 神들 :

  로마인들은 그리스를 占領하였지만 그리스 文化는 로마를 占領    
  하였다.  로마인의 宗敎도 그리스의 多神敎에게 흡수된 꼴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Homer가 쓴 Iliad and the Odyseay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도 過言이 아니다.  

  그리스의 神들을 살펴보면,

  Zeus가 父神이고 그 아래 下層級의 神들이 그들이 맡은 職責    
  을 따라 활동한다.  그리고 그리스 神이 그대로 로마의 神과    
  同質 同格의 神으로 탈바꿈한다.

   그리스의 神들 神들의 役割 로마의 神들

       Jupiter         父 神            Zeus
     1) Hera         結婚神           Juno
     2) Hermes      神들의 멧센저      Mercury
     3) Poseidon     바다의 神          Neptune
     4) Artemis       自然과 動物을       Diana
                    保護하는 神  
     5) Ares        戰爭 神            Mars
     6) Athena      知慧로운 女戰士    Minerva
                    匠人(Craftsmen)

     7) Aphrodite   사랑의 神          Venus
     8) Hephaestus 불의 神, 대장간 神, Volcanus
                   科學技術의 神 

  이러한 로마의 宗敎정서는 BC. 44경에 많이 식었다.

  그러나 Augustus가 卽位하면서,

    寺院을 再建하고 宗敎의 振興을 도모하였다.  이는 宗敎를      
   통해 제국을 統一하고 자신이 宗敎의 保護者로서 政治的인      
   支持를 받겠다는 心算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多神 宗敎는 주로 上部階層의 政治人들이
     政治的 理由로 받아들이고 利用했을 뿐이다.

     그 후, 지방에서 많은 上院議員들이 選出되어 왔는데 그들      
    이 올때에 그들의 神들을 로마에 輸入하여 로마의 神들과      
    結付시켰다.  그 예가 Isis를 Venus로 混用하는 일들이다.

皇帝 崇拜

  애급에서는 王을 神格化 하였고, Alexander大王도 自身을 神格    
  化 시켰다.  그리스 統治者들도 “救世主”라는 稱號로 자신을    
  神格化 시켰다.  이런 先例를 따라 Augustus도 內心 그러한    
  예우를 바랐을런지 모르나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神格化시키지 않았다.  다만 그를 위해 寺院을 짓는 것은 許容    
  하였다.  Tiberius도 같은 立場을 取했으나 Caligula는 자신을  
敬拜할것을 요구하였다.  

  Claudius 皇帝는 愼重하였으며 자신의 神格化를 拒絶하였다.
  Nero는 市民의 義務로서 그를 敬拜할것을 要求하였다.

個人宗敎

  神秘宗敎 : 여기서 말하는 神秘宗敎는 神靈宗敎라는 뜻에서
             라기 보다 秘密리에 本人이 원해서 入敎한다는
             意味에서 미스테리 宗敎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市民들은 주로 동쪽에서 온 神秘宗敎에 心醉하였다.    
  考古 學者들은 로마市에서 수많은 神秘宗敎의 寺院들을 發掘해    
냈다.

  그들 秘密宗敎들을 받아들인 신도들은 대개 共通的으로 아래의    
   세가지 일에 魅力을 느낀것 같다.  

      1) 貞潔儀式
      2) 接神
      3) 死後保障

  1. Eleusis : BC. 6년부터 Athene에서 시작한 邪敎이며, Hades      
     가 地下 世界로 데리고 간 딸을 찾는 Demeter의 神話를
     骨格으로 體系가 짜여져 있음.

  2. Dyonysus, or Bacchus(酒神)
     여자들만 會員이 되었으나 후에 남자도 加擔하였다.  여자들      
     이 년에 수차례 家出하여 嚴密한 地方으로가서 强烈한 性的        
     行爲로 恍惚地境에 들어가게 한다고 한다. 후에는
     주신 Dyonysian을 崇拜함과 함께 同性戀愛를 즐기는 宗派.

  3. Mother Goddess (Magna Mater)
     BC. 204에 로마에 輸入, 母神의 愛人 Attis가 去勢되고
    소나무 밑에서 죽었음으로 이 集團의 祭司長들도 宦官이
    되어 神을 섬겼다.

  4. Isis 애급神
     이시스神이 殺害 당해 토막난 남편 Osiris를 찾아 다시 再生      
     시키고 그 사이에서 아들 Horus를 낳았다는 神話를 根據로
     그를 崇拜하는 集團.
     Caligula(37-41)皇帝가 로마에 Isis 神殿을 建築하였다. 

  5. Mithras 靑銅器時代부터 내려오는 Indo계 이란에서 온
     神이다.  Mithras가 황소를 殺害하는 地下 壁畵 앞에서
    秘密裡에 儀式을 갖는다.  남자들만 이 集團에 加入할
    수 있으며 주로 軍人, 商人, 公務員이 會員이 된다.

로마의 哲學

  1. Epicurianism(Epicurus, BC.342-270,에 의하여 創設된 學派)
    
    그들은 宗敎와 迷信을 排擊하고, 理性的 思考를 勸獎하였다.
    神을 믿는다고는 하나 神들은 世上事에 無關心하고 善惡에    
   대한 賞罰을 믿지 않았다.  靈魂은 不滅하지 않으며 생의
    目的은 즐겁게 사는것이나 얄팍한 快樂과 즐거움은 區別
    하였다. 苦痛을 피하고, 友情을 開發함으로 樂觀的으로      
    살것을 가르친다.

    野望과 富와 權勢와 名譽의 追求를 否認한다.
    마음의 平安은 慾心을 調整하고, 죽음과 神들에 대한 恐怖를
    除去함으로 얻을수 있다고 가르친다.

  2. Stoicism 스토아學派
  
    키프로스의 제논에 의해 創始되었다.  그들은 범신론자 들이    
    며 宇宙는 Pneu(氣, 火氣)에 의하여 形成된 有機體라고 생각      
    하고 인간은 小 宇宙요, 그 本質은 로고스이며 宇宙의 本質      
    도 로고스이므로 人間과 宇宙는 同一質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論理와 自然學 그리고 倫理를 소중히 생각하였다.  
    人間은 理性을 따라 사는 것이 宇宙原理에 順應하는 것이라      
    고 생각하고 그것이 賢明한 사람의 生活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이 理性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同胞가되며 여기에서 사해동포(四海同胞)      
    가 되는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를 제창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1. 人間은 神의 存在에 대해 同意하며
  2. 누군가가 上層에 있어야 하고
  3. 原理가 宇宙를 統一하고
  4. 自然秩序는 마음의 秩序와 같고
  5. 敬虔하고 거룩하고 知慧로움은 神을 目標로 하는 行爲이다.
     이런 緣由로 神은 存在한다라고 主張한다.

  靈魂은 神의 불티(Spark)이며 死後 暫定的으로 個體를 維持
  하나 窮極的으로는 神에게 吸收되어 神과 하나가 된다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의 身分을 있는 그대로 不平없이 받아들일 것을
  가르치며 德은 行動에 있지 않고 態度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結果的으로 그들은 세상의 苦痛을 外面하고 人間이 發展해
  나아갈수 있는 勇氣를 앗아가 버린것이다.

로마 敎會

로마 敎會의 位置

1世紀의 로마敎會는 Trastevere地域, Porta Capena地域, Aventin hill地域 그리고 Marsfield 地域 등 4개 地域에 흩어져 있었다.

1. Trastevere地域은 埠頭에 隣接한 地域으로 港口의 勞務者,
  창고지기, 船員, 벽돌工, 타일工, 陶工, 精米工, 皮革工 등이
  雲集해서 사는 最大 人口 密集 地域이다.

  이곳의 집들은 대개 5층 정도의 Tenament라는 庶民 아파트들    
이다.  이곳은 로마시에서 製菓 商店이 가장 적은 곳이어서
  빵을 구하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은 주로 로마로 移住해오는    
  貧民들이 集結하는 곳이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도 이곳으로    
  移住해 와서 살았다.  미켈란젤로가 마리아의 모델을 삼기
  위해 유대 女人을 찾아 이곳 Trastevere에 왔다는 記錄이
  있다.  이렇게 14世紀에도 유대인이 살았지만 지금도 많은
  유대인이 그곳에 居住하고 있다. 


   로마에 大火災가 일어났을때 티베르강의 德澤인지 이 地域만은    
  禍를 免했다.  이것이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罪를 덮어
  씌우기 좋은 핑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學者도 있다.

2. Porta Capena 地域도 Trastevere와 마찬가지로 늪地帶 였으며    
  貧民들이 사는 地域이였다.  특히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이
  地域을 通過하므로 많은 사람이 붐비고 混雜했다.  주로 貿易    
  商, 手工業, 運送業(마차)을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았다.  

  인구의 3%(富裕層 貴族들)가 居住地의 1/3을 使用하였으며
  일반 庶民들은 Insulae라는 세집에 살았다.  로마시는 14개구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 貧民 地域에서는 個人 住宅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Insulae라는 Tenament 세집은 길고 침침한
  홀을 가진 4-5층 建物들인데 위층으로 오를수록 방이 작아진    
  다.  위층의 방의 크기는 1坪 남짓하다.  하층의 7-8坪이 되는    
  방들이 있었으나 보통 칸을 질러 여러가구가 使用하였다.  그    
  곳은 화장실이나 水道施設도 없었다.    

  부엌은 주로 共同으로 使用하였으며 1坪 남짓한 방의 집세는    
  월 40데나리온 정도다.  하루 勞賃이 1데나리온 인데 40데나리    
  온은 堪當하기 힘들어 방을 나누어 써야 하